경향신문| 기사입력 2010-06-09 10:32 기사원문

1967년, 정부는 서울 도심의 개발을 위해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용산, 남대문, 청계천에 살던 사람들이 바로 이곳 '백사마을'이라 불리는,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로 옮겨와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백사마을 골목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다일기자)


40년 전 이야기를 해주시는 동네 할머니들. (이다일기자)

"학교도 다니기 전 어릴 때에요. 아버지가 생일이라고 머리맡에 축구공을 사다 놓으셨더라고요. 너무 기뻐서 당장 들고 문 밖으로 나가서 힘껏 찼어요. 데굴데굴 산동네를 굴러 내려간 공은 하수도로 쏙 들어갔고 동생하고 하수도 끝에서 온종일 공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결국 못 찾았어요." 어린 시절을 중계동 104번지에서 지낸 임상배(34)씨의 기억이다. 불암산 자락에 자리한 산동네. 어머니는 물을 길어오셨고 아버지는 마치 맥가이버처럼 집을 고치셨다. 지금은 모두 외지로 나가 살림을 차렸지만 어릴 적 그 동네는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골목 속의 집 104번지에는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 많다. 옛날부터 나눠진 골목들은 사람 한명 겨우 지나갈 좁은 길들로 이뤄졌다. 언덕 뒤에 집이 있고 골목을 돌아서면 집이 나온다. 그래도 개성 넘치는 것이 어느 집에서도 똑같은 대문을 찾아볼 수 없다. 골목을 뛰어다녔을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다일기자)

소위 백사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중계동 104번지는 대한민국의 개발사에 그늘처럼 남아 있다. 1967년부터 정부는 개발을 이유로 강제 이주를 추진했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바로 이곳 백사마을에 마련해줬다. 당시 용산, 청계천, 안암동의 판자촌에서 살던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주대책으로 해준 것은 30평 남짓한 천막이 전부. 그나마 분필로 넷으로 선을 그어 네 가구가 살도록 했다. 천막 한 칸을 넷으로 나눴으니 한집에 8평 남짓. 그래서 백사마을의 집들은 8평부터 시작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사 간 집을 사들여서 합치고, 남는 땅에 집을 지으면서 이곳의 주택은 대부분 20평 남짓한 구조로 변경됐다. 

등산로 104번지 달동네의 꼭대기는 노원구 공릉동의 산과 맞닿았다. '한국전력 뒷산'으로 불리는 산에는 등산로가 꾸며져 있어 주민들의 산책길로 활용되고 있다. 옛날에는 들짐승이 많아 혼자 다니기 위험한 산, 전쟁으로 인해 벌거숭이가 된 산이었지만 지금은 울창하게 숲을 이뤘다. (이다일기자)

늑대가 울던 산골동네

중계동 백사마을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노원구 중계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90년대 중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배밭과 논이었던 땅이 모두 아파트로 변했다. 지금은 학교와 학원이 많기로 소문난 동네가 됐다. 백사마을 역시 주변의 발전에 따라 재개발을 모색하고 있다. (이다일기자)

104번지가 처음 생길 때 이사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박해숙 할머니(76)는 마치 즐거운 옛날 얘기 하듯 40년전의 추억을 꺼내 놓는다. "내 아들이 50살이니까 정확히 44년 됐지. 여기 6통에서 내가 제일 먼저 집을 지었어요. 밤에 물 뜨러 가면 '그르릉~'하면서 늑대가 뒤를 따라와요. 깜짝 놀라 뛰어 들어오면 시어머니가 남자가 치근대는 줄 알고 '언놈이 붙잡던가?' 그랬어요. 하하하. 산 속에 갑자기 사람들이 이사 왔으니 늑대가 먹을 걸 찾아 들어왔지요. 그땐 그랬어요." 박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땔감도 없어서 산에 있는 나뭇가지, 잡풀까지 모두 긁어서 땠다고 한다. 그마저도 산을 지키는 사람한테 붙잡히면 모두 두고 내려와야 했다. 용산에서 이사 왔다는 다른 할머니는 "윗목에 물이 얼고 걸레도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겨울을 보냈다"며 "연탄 한 장에 6원 50전하던 시절인데 그걸 아끼느라 방이 얼어붙었어요."라고 말했다. 

고추농사 집 앞에 고추, 호박, 상추를 심어놓은 담벼락이 눈에 띈다. 때마침 물을 주던 할머니는 "혼자 먹고 남을 만큼 수확이 잘 된다."며 농사 자랑을 했다. 작은 고추와 호박잎이 담벼락을 따라 자라고 있다. (이다일기자)

워낙 산골이라 학교 가는 길도 멀고 험했다. '토끼길'이라고 부르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지금의 하계동 '연촌초등학교'가 나왔다. 거기까지 아이들은 모두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이 길은 짐승이 많아 남자고 여자고 혼자서는 다니지 못하는 길이었다. 박 할머니는 "지금이야 중계동이 학원도 많고 교통도 좋지요. 그때는 오솔길, 진흙길뿐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심지어 장마철이 되면 부모들은 난리가 났다. 줄줄이 물이 세는 집을 수리해야 했고 학교에 간 아이들이 행여 물에 떠내려 갈까봐 아이들 데리러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산골인데도 기반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장마철이면 물이 차는 곳이 수두룩했다.

교회 백사마을 아이들에게 교회는 동네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었다. 교회 앞마당은 축구장이고 야구장이었다. 언덕배기 산동네에 있는 교회라 한쪽은 철창으로 공이 떨어지지 않게 막아놨지만 아이들이 놀다보면 철창을 넘어 아랫집으로 공이 날아가기 일쑤였다. (이다일기자)

'육여사국수'를 먹어 봤어요?

계단은 몇 개? 백사마을에서 태어난 임상배씨는 "동생과 함께 이 계단이 몇 개인지 세어보는 놀이를 했다."며 "어릴 때는 높고 커 보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렇게 작은 계단과 골목인게 새삼스럽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다일기자)

방앗간 한편에 할머니들이 모였다. 겉으로 봐서는 영업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오래된 간판과 제분기가 방앗간임을 추측케 한다. 40년전 이야기를 부탁했더니 끝없이 이어질 기세다. 그러다 뜬금없이 '육여사국수'이야기가 나왔다. 매일 점심이면 '육여사국수'를 받으러 가는 게 일이라고 했다. "냄비하나 들고 그거 타러 가면 국수에 노란 무 하나 얹어서 줬어요. 그걸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나, 집에 가져와서 김치랑 해서 애들이랑 같이 먹었지요." 당시 104번지에서는 정부에서 밀가루 국수를 해서 나눠줬는데 이를 두고 주민들이 '육여사국수'라고 이름을 붙였다. 당시가 박정희 대통령시절이라 육영수여사의 성을 딴 것이다. 

갈림길 백사마을 입구 갈림길이다. 슈퍼마켓과 비디오 대여점이 사이좋게 붙어있다. 이곳의 건물들은 대부분 옛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고 작은 가게들도 옛 모습 그대로 장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다일기자)

당시나 지금이나 아이들 입맛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똑같은 국수를 계속 먹으니 아이들이 질려했다. 한 할머니는 "국수를 계속 주니 새끼들이 안먹을라케. 그래서 그거 타다가 채반에 말려서 기름에 튀겼지. 그래서 설탕 쳐주면 잘 먹었어. 그래 살았어요."라며 먹을 것 귀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산 따라 지어진 집 초창기 마을에는 먼저 들어온 사람에게 산 아래쪽 터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주해 온 지역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서 살기 시작했고 청계천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곳, 남대문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곳이 조금씩 나눠서 형성됐다. 지금은 서로 집을 팔고 사고 이사를 다녀서 예전 같은 구분은 사라졌다. (이다일기자)

개발과 재개발로 이어진 한평생



중계동 104번지 할머니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우린 별거 다 겪어본 세대에요. 해방에 전쟁도 겪었지, 거기다 개발한다고 이주해서 여기로 옮겨왔고 40년을 산동네를 오르내리며 살았지요." 지금 마을에는 대부분 노인들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릴 적 추억의 동네로 104번지를 기억하고 있다. 오래 만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쉽게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이유가 또 있다. 개발이 되지 않아 옛날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40년전 지어진 집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고 동네 입구 가게부터 언덕 중턱에 자리한 교회까지 옛 모습 그대로다. 어릴 적 뛰어놀던 계단도 그대로 있고 물탱크가 있던 뒷산도 등산로로 조금 정비됐을 뿐 변한 것이 없다. 다만 달라진 것은 어릴 적 커 보이던 건물과 마당이 지금은 깜짝 놀랄 만큼 작아 보인다는 것.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며 드라마를 비롯해 많은 매체에 노출되던 104번지도 재개발을 직면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추진되던 재개발이 갖은 사연 속에서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 이곳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되던 안되던 빨리 결정이나 났으면 좋겠어. 집을 고치지도 못하고 사니까 말이지. 나 죽기 전에 아파트 기둥 올라가는 거나 보려나 모르겠네."라고 말했다. 

<경향닷컴 이다일기자 cam@khan.co.kr>

가는길

지하철 4호선, 7호선 노원역, 1호선 창동역에서 1142번 버스로 갈아타고 종점까지 가면 된다. 버스 종점이 104번지 시작이며 큰 은행나무가 서 있어 찾기 쉽다. 중계동 104번지 백사마을이 사진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무분별한 촬영으로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다. 주민들의 생활을 존중하며 옛 모습을 담는 노력이 필요하다. 1,200여 가구가 모여 있는 넓은 지역이므로 한 바퀴 둘러보는데 두어 시간은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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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매일매일 달려 이다일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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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104번지, 백사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혹은 와전되어 천사마을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철거민들이 이주해와서 정착했고 또다시 재개발과 철거에 문턱에 있는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 이야기 입니다.

불암산 자락 산동네, 중계동 104번지의 오밀조밀한 집들이 보입니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들은 강남 대치동 뺨치는 학원가가 밀집된 중계동 아파트들입니다.

60년대 말.
서울 청계천에는 고가도로가 건설됩니다.
청계천에 판자집을 짓고 살던 이들은 어디론가 떠나야 했습니다.
용산도 마찬가집니다. 남대문도 그랬구요.

그때까지 서울 곳곳은 판자집이 늘어섰고 도시는 정비되지 않았습니다.
피란통에 여기저기 자리잡은 사람들이 그저 '내집이네~'하며 살고 있었죠.

물론 운좋게 내집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오늘 이야기하는 이곳 104번지 사람들은 그런쪽과 거리가 있나봅니다.

앞서 얘기한 청계천, 용산, 남대문에 줄지어 있던 판자집들이 철거됐습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강제 이주조치됐구요.
이주된 바로 그곳이 여기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입니다.

60년대 말에는 서울시도 아니었고 경기도 양주군이었습니다.
이후 도봉구에 속했다가 노원구가 생기면서 노원구 중계동이 됐습니다.

트럭에 실려 이주해온 주민들에게 나라에서 준것은 겨우 천막뿐이었습니다.
넓은 천막. 서른평이 조금 넘는 천막입니다.
헌데 바닥에는 분필로 선을 그었습니다. 서른평의 천막을 4등분해서
모두 4가구가 살도록 했습니다.

화장실은 커녕 물도 나오지 않아서 산 아래 은행나무 옆 우물터까지
매일 물을 길으러 가야했습니다. 
천막옆에 땅을 파 놓고 화장실로 사용을 했구요.

먹고 살것이 막막했던 당시에 정부에서는 식량도 배급해줬습니다.
매일 점심이면 우동국수에 빨간 단무지를 하나 얹은 국수를 배급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 국수를 일명 '육여사국수'라고 합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라 붙은 이름입니다.

집을 짓는것은 이주민들 몫이었습니다.
미리 집을 지은 사람들에겐 1만원을 보상해줬지만 
산동네로 이주해 온 주민들이 넉넉한 집을 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불암산 자락인 이곳에는 들짐승들이 많았습니다.
'개'라고 생각하고 쳐다본 큰 짐승은 늑대였습니다.
산에 있던 토끼를 털쪼까리만 남기고 잡아먹는 야생 늑대입니다.

늑대들도 당황했겠죠. 
평생 살아온 산에 사람들이 어느날 몰려들었으니 말이죠.

어쨌건 사람들은 그곳에 자리잡고 살기 시작했고
어느덧 40년이 흘렀습니다.

살기위해 이곳에서 젊음을 보냈던 아낙들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동네 방앗간에, 미용실에, 계단 귀퉁이에서 삼삼오오 수다로 시간을 보냅니다.
아이들은 모두 장성했고 손주들이 대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서울의 개발로 외딴곳까지 원하지 않는 이주를 해야했던 주민들이
이제는 재개발을 원하고 있습니다.

중계동 104번지가 재개발된다는 얘기가 나온것은 벌써 십여년.
속시원하게 진행되진 않았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될라면 빨랑 되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네요'라며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다 낡아 무너질듯 한 지붕, 허술하게 지어진지 40년이 지난 축대가
재개발을 핑계삼아 고쳐지지 못하고 남아 있습니다.

계단가에 모여 담소를 나누던 노인들은 재개발 때문에 구청에서
노인정도 지어주지 않는다며 볼멘소리를 합니다.

이곳에 남은 칠순이 넘은 노인들은
해방을 겪었고 전쟁을 겪었습니다.
또한 개발을 위해 강제 이주됐고 지금은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40년을 산꼭대기에 살면서 물을 길어나르고
음식꺼리를 사서 언덕베기 집으로 지고 날랐습니다.
장성한 자식들은 모두 출가했지만 노인이된 그들은 아직도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남은건 쓸쓸한 노인들과 허물어져가는 집들
그리고 평생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성치 못한 몸뚱이뿐입니다.

취재중에 방앗간에서 만난 한 할머니에게 멍청한 질문을 했습니다.
"할머니, 여기서 평생 사신 이유가 뭐에요?"

멍청한 질문에 답은 간단했습니다.
"돈없으니까 여기 계속살았지. 뭐 남은게 있나."

취재에 나서기 전, 그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고 알려진 이곳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봤습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중계동 104번지를 이제 곧 사라질 
안타까운 유물처럼 미화하는 많은 사진과 글도 보입니다.

직접 가본 중계동 104번지는 이쁜 사진찍기 위한 출사지가 아니었습니다.
미화될 추억의 달동네도 아니었습니다.

개발과 재개발,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약자들의 인생이 담긴
우리 사회의 그늘진 한 구석이었습니다.

지금도 개발은 계속됩니다.
서울 곳곳이 재개발 지역으로 묶여있습니다.

정작 그 땅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보다, 그 땅의 정당한 가치보다
부정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서울의 발전을 위해 청계천, 남대문, 용산을 내어주고
산동네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인생을 통해서 개발과 재개발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취재였습니다.

취재하고 온 느낌을 잊지않기위해 몇글자 적어봅니다.
기사는 다음주 수요일 네이버 '아름다운한국'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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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매일매일 달려 이다일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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